적으로 만났지만 전쟁을 통해 서로의 우정을 발견하고 화해하는 조선과 일본의 두 인물을 그린 영화 <마이웨이>, 다들 보셨나요? 

저는 우선 장동건, 오다기리조, 김인권, 판빙빙 등 주연 및 감초 같은 조연들의 몸을 불사르는 연기력에 한 번 놀라고, 무엇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항공모함과 전투기가 몰려오는 장면처럼 정교하면서도 스크린을 압도하는 전쟁신들의 큰 스케일에 다시 한번 놀랐답니다. 하지만 김준식(장동건)과 하세가와 타츠오(오다기리 조)가 왜 영화 내내 군복을 여러 번 갈아입으며 이렇게 고생스러운 전쟁을 한 번도 아닌 3번을 겪어야 했는지, 김준식이 다시 달릴 수 있도록 응원해주었던 손기정 선수는 일장기를 달고 우승한 최초 한국인이라는 것 외에 어떤 분이었는지 영화를 본 후에도 궁금하더라고요. 

그래서 앞으로 <마이웨이>를 보실 분들과 이미 관람하신 분들에게 알고 보면 더욱 재미있는 <마이웨이>의 7가지 역사 이야기를 준비해보았습니다.^^ 



독일 군복을 입은 한국인 


1944년에 출간된 역사학자 스티븐 엠브로스 (Stephen E. Ambrose)의 저서 <D-Day>에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연합군에게 체포된 독일 군복을 입은 한 명의 동양인 병사의 사진이 실려있는데요. 이후 이 남자는 양경종이라는 이름의 조선인으로 밝혀졌으며, 그 외 여러 명의 동양인이 독일 군복을 입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고 합니다. 과연 조선인 양경종은 어떻게 조선에서 머나 먼 노르망디까지 가게 되었을까요?

스티븐 엠브로스는 그의 책에서 양경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일본군으로 징집됐다. 1939년 만주국경 분쟁 시 소련군에 붙잡혀 Red Army에 편입됐다. 그는 다시 독일군 포로가 되어 대서양 방어선(Atlantic Wall)을 건설하는데 강제 투입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다시 미군의 포로가 됐다. 붙잡혔을 당시 아무도 그가 사용하는 언어를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한국인으로 밝혀졌으며 미 정보부대에 자신에 대해 이야기 했다.

- 1944년 6월 6일 프랑스 노르망디, Utah 해안에서 -  
강제규 감독님이 이 단 한 장의 사진을 보고 모티브를 얻어 <마이웨이>를 만들 결심을 했다고 하죠. 연합군 포로로 잡힌 양경종씨는 1920년생으로, 1947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40년 동안 평범한 미국 시민으로 살면서 슬하에 2남 1녀 자녀를 두었고, 1992년 일리노이주 노스웨스턴 대학 부근에서 사망했다고 해요. 가족들에게는 자신의 전쟁 경험을 이야기한 적이 없다고 전해지는데 사실 여부를 떠나 어쩐지 마음 한 켠이 짠해지네요.


마라토너 손기정 & 한국 최초의 마라톤 대회


최근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홈페이지에서 일제강점기 당시 1936년 독일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을 획득한 손기정(1912~2002) 선생의 국적을 수정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한국인으로서의 지위를 상당 부분 찾은 것이죠. 대한체육회의 요청을 일부 받아들여 홈페이지 선수 소개란에 '손기정'이 일본식 이름인 '기테이 손'으로 표기하게 된 시대적 배경 등을 자세히 추가한 것인데요.

‘한국의 손기정은 1931년 세계신기록을 세웠으며, 한국이 일본에 강점됐기 때문에 손기정과 동료 남승룡은 일본 이름으로 올림픽에 출전할 수밖에 없었다. 손기정은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다’로 당시 시대적 배경을 상세히 서술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IOC는 손기정 선수의 공식 이름과 국적 정정 요청은 거절했습니다. 이는 올림픽 출전 당시 등록된 이름과 국적을 바꾸는 것은 역사를 훼손할 수 있다는 이유입니다. --; 프로필에는 종전 그대로인 것이죠.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손기정 선수는 1936년 제 11회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서 일본 국기를 달고 참가해 올림픽 대회 신기록인 2시간 29분 19초 20으로 우승을 차지했고, 당시 '동아일보'는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우고 사진을 게재했습니다. 손기정 선수는 일본 선수단에서 열어준 축하 파티에 가지 않고, 베를린 교포이자 안중근 의사의 사촌인 안봉근(安鳳根)의 집에 가서 난생 처음 태극기를 구경한 것을 위안 삼아 우승의 들뜬 밤을 보냈다고 하는군요.

한편, 한국 최초의 마라톤 대회는 1920년 조선체육협회 주최로 열린 경성일주 마라톤 대회로서 당시 대회 우승자는 최홍석(崔洪錫)으로 2시간 11분 27초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노몬한 전투


영화 속 마라토너 김준식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어 ‘노몬한 전투’를 치르게 됩니다. ‘노몬한’이란 한자식 표현으로 노(소련), 몬(몽골)간의 국경선 일대의 벌판을 지칭합니다. ‘노몬한 전투’는 1939년 만주와 몽골의 국경지대인 노몬한에서 일어난 일본군과 몽골·소련군 간의 대규모 충돌사건을 일컫는데요, 하르하강을 건넌 몽골군을 일본군이 불법 월경으로 간주해 충돌하자 소련이 기계화 부대를 투입하여 일본군을 전멸시켰던 전투입니다. 일본은 노몬한 ‘전투’라는 단어 대신 노몬한 ‘사건’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하네요. 


우리나라 최초의 교통 법규?


김준식이 손기정 선수를 태우고 전속질주 했던 인력거 기억하시나요? 
두 개의 큰 자전거 바퀴 위에 좌석을 만들어 사람의 이동 수단으로 탄생한 인력거는 1869년 일본인 다카야마 고스케(高山幸助) 등이 서양마차를 본떠 만들었으며, 우리 나라에는 1894년(고종 31), 하나야마(花山)라는 일본인이 10대의 인력거를 수입해 들여와 처음으로 선보였다고 합니다. 이후 인력거는 부산·평양·대구 등 지방도시에 급속히 보급되어 가마를 대신하는 중산층 이상의 교통수단으로 번성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인력거의 갑작스런 등장은 서민의 보행 교통을 크게 방해하였고, 초기의 승객들은 대부분 일본인이거나 일본인 기생, 한국인의 경우는 귀인 또는 유지(有志)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횡포 또한 적지 않았다고 하네요. 이에 경무청(警務廳)은 1908년, '인력거영업단속규칙'을 공포하여 인력거 영업허가를 비롯해 인력거꾼의 자질·운임·속도·정원·피양(避讓:길을 서로 비켜 주는 일) 등 최초의 교통법규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고위 관리가 인력거를 탈 경우, 그의 신변 보호를 위해 수행하는 보호 순검도 인력거가 급히 달리면 그에 맞는 속도로 달려야 하는 곤욕을 치렀다고 합니다. 또한 인력거꾼에게도 엄격한 단속 규칙이 14가지나 적용되었다고 하는데요. 예를 들어, 주차장 이외에서 손님을 기다리거나 길가에서 이유 없이 방황하면 안 되고, 행인에게 승차를 강요하거나 거만한 말과 행동을 하면 안 되었다고 하네요. 


일본군의 규범


<마이웨이>에서 김준식과 종대가 처음 일본 군대에 징집되어 복창해야 했던 일본군의 규범은 어디서 나온 것이며, 어떤 내용을 담았던 것일까요. 군인칙유(軍人勅諭)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군인의 정신자세와 행동규범을 규정한 책으로, 내용을 보면 일왕에 대한 충성과 우국충정이 비장함을 넘어 광기까지 느껴질 정도라고 하는데요. 영화 속 김준식과 종대가 일본 군대에 끌려가 복창해야했던 5개조 정신 주문도 이 책에 담겨 있다고 합니다.    

군인칙유(軍人勅諭)는 태평양 전쟁 도발 당시 총리였던 도조 히데키가 공포한 전진훈(戰陳訓)과 더불어 군인들이 금과옥조로 삼아 지켜야 할 절대적 가치가 되었다고 하네요. 


독소전쟁


노몬한 전투에서 도망치는 자신의 부하를 총살하고, 몽골-소련 연합군 탱크에 맞서 자살특공대를 앞세우는 등 잔인한 일본 관동군 대좌 역할을 했던 하세가와 타츠오는 1941년 독소 전쟁에서 자신과 같이 도망치는 부하들을 죽이는 소련 장교를 보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죠.

독소 전쟁은 1940년 발칸 문제로 독일과의 관계가 급격히 냉각되기 시작하며,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2개월 이내에 소련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는 히틀러의 계획에 따라 180만 병력을 투입하여 소련을 기습 공격한 전쟁인데요.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피해가 가장 큰 전선으로, 소련군 2,900만명이 전사하고 600만이 포로로 잡혔으며, 나치 독일군도 150만명이 전사하고 40만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하니 전사자 규모가 상상이 안 갈 정도죠.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총 5천 만명이 전사했는데, 독소 전쟁에서만 3,600만의 병사가 목숨을 잃은 대전쟁이라고 할 수 있죠.

상황이 악화되자 소련은 병력을 추가하기 위하여 모든 방법을 동원하기 시작하는데 그 중 한 가지가 전쟁 포로를 소련군으로 전향 시켜 전장에 투입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노몬한 전투 이후 소련의 포로가 된 관동군 병력과 그 외 지역에서 소련의 전쟁 포로가 되었던 병력들은 광활한 소련 땅을 가로 질러 강력한 탱크를 앞세운 독일군에 대항하기 위해 맨몸으로 던져졌다고 하는데요. 투입된 포로 병력 중에 김준식, 하세가와 타츠오가 있었던 것이죠.


노르망디 상륙작전


<마이웨이>의 백미이자, 헐리우드 영화 못지 않은 대규모 전쟁신이라 할 수 있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는 실제로 당시 독일 항복 후 체포된 포로군들 중 여러 명의 동양인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요. 일본군과, 한국인이나 일본군으로 징집되었다가 1939년 만주 국경 분쟁 시 소련군에 붙잡혀 적위대(赤衛隊)에 편집되었고, 이후 다시 독소 전쟁에서 독일군 포로가 되어 대서양 방어선 건립에 투입되었다가 노르망디 상륙 작전 때 미군의 포로로 잡힌 소수의 동양인이죠.  

노르망디 상륙 작전(Invasion of Normandy)은 프랑스의 노르망디 반도로 미국과 영국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이 1944년 6월 6일 벌인 상륙 작전으로, 미군과 영국이 본격적으로 벌인 유럽 진공의 시작이었는데요.

작전은 북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을 5개의 구역으로 구분하여 각 구역별로 연합군이 상륙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하세가와 타츠오가 김준식과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탈영하려고 했던 셀부르 항에서 가장 가까운 서쪽으로부터 유타 해변, 오마하 해변, 골드 해변, 주노 해변, 소오드 해변이 그 곳이라 하네요. 

도버 해협에 분 태풍과 장교 토머스 미헌 3세의 전사에도 불구하고, 오마하 해변을 제외한 모든 상륙 지점의 부대가 순조롭게 상륙에 성공하죠. 결국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는 결정적 계기이자, 유럽 대륙의 해방을 가져다 준 기념비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남게 되죠.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그래도 종종 들어봤지만 ‘노몬한 전투’, ‘독소전쟁’은 저에게는 다소 생소했는데요. 개인적으로 <마이웨이>를 본 후 김준식과 타츠오의 진한 우정을 느낄 수 있었던 휴머니즘의 감동과 함께, 2차 세계대전 당시 격변했던 시대적 상황들과 배경들을 배울 수 있는 일석이조의 영화였습니다. 알고 보면 달리 보이고,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지요. 작은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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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iok2000.blog.me BlogIcon 핑크그린 2012/01/05 14: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관련글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