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CJ


※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SF시리즈에 취약한 관객들에겐 유독 부담스러운 몇 가지 이름들이 있다. 70년대가 그 시작이었다. 1977년에 <스타워즈>(새로운 희망)가 개봉했고, 리들리 스콧 감독이 1979년 <에일리언>을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시네필들의 중요한 숙제 중 하나가 시작됐다. 

리들리 스콧은 이후 82년에 <블레이드 러너>, 91년에 <델마와 루이스>를 만들면서 자신의 이름을 장르영화의 성전에 올렸다. 그가 7~90년대를 거치며 스스로 대표작을 선언하듯 내놓은 이 세 편의 거대한 이름들은 리들리 스콧의 정체성을 요약하는 샘플 마냥 제각기 고유하고 특징적이다. 기회가 된다면 리들리 스콧이 얼마나 방대한(혹은 황당한) 작품 세계와 취향의 범주를 지녔는지 이야기해보고 싶다. 

어쨌든 그 중에서도 <블레이드 러너>는 꽤 기이한 운명을 지닌 영화로 회자될 만하다. 영화 역사상(혹은 80년대) 최고의 SF영화 중 하나로 손꼽히는 <블레이드 러너>는 정확히 7개의 판본이 존재한다. 그 중 5개의 버전이 관객에게 공개된 적 있고 극장판, 감독판, 파이널 컷의 세 버전이 주축을 이룬다. 얼마 전 우디 앨런 감독의 신작 <원더 휠> 큐레이터 해설을 마치고 객석에서 나온 질문 중 하나가 “곧 개봉하는 <블레이드 러너>는 왜 ‘감독판’이 아니고 ‘파이널 컷’인가요?”였다. 


▲ 리들리 스콧은 온전히 두 여성이 꾸려 나가는 로드 무비(델마와 루이스, 1991)를 상업 영화로 성공시켰다.(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왜 ‘파이널 컷’인가?

파이널 컷이라는 명칭부터 보편적으로 쓰이는 개념은 아니다. 감독판(디렉터스 컷)이 존재하는 것도 상업 영화계에선 <블레이드 러너>가 효시 격이다. 1982년 개봉한 <블레이드 러너>의 미국 극장판은 제작사의 압력으로 상당수가 편집되고 내레이션이나 해피엔딩 같은 친절한 안내어들이 붙었다. 당시로선 지나치게 음울하고 비관적이며, 대사없이 느리게 전개된다는 이유였다. 그건 원작이었던 필립 K. 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가 품었던 쓸쓸함을 제대로 이어받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눈밝은 관객들이 리들리 스콧의 야심을 알아봤고, 그들의 지지가 10년 뒤인 92년, 감독판을 불러낸다. 감격스런 재개봉을 하긴 했지만 편집의 실수나 후보정의 아쉬움 등이 남았다. 2007년, 리들리 스콧은 자신의 미학적 집착을 십분 발현해 디지털 리마스터링한 ‘파이널 컷’을 내놓는다. 감독이 스스로 만족스런 최종 완성본이라 인정했으니 <블레이드 러너>의 파이널 컷은 엄밀한 의미에서 진정한 디렉터스 컷인 셈이다.


가장 익숙한, 인간적 디스토피아

<블레이드 러너>가 묘사한 암울한 미래상은 여러모로 후대 SF영화의 교본이 되었다. 때는 2019년, 다른 행성(오프 월드)으로의 이주가 보편화된 세계다. 복제 인간 넥서스6 모델(리플리컨트)은 타이렐 사가 고도의 유전과학으로 이룩한, 인간과 같은 형상이되 일부분에선 훨씬 더 뛰어난 능력을 지니도록 설계되어 우주 정복이나 위험한 노동의 인력으로 쓰이는 존재다. 지능과 힘을 고루 갖춘 이들은 인간의 감정까지 깨달으면서 오프월드에서 인간다운 삶을 위해 반란을 일으킨다. 우주선을 탈취한 리플리컨트들의 존재가 알려지자 지구에선 그들을 불법의 존재로 선포하고 발견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은퇴’라 불리는 이 작업을 도맡은 특수경찰이 바로 ‘블레이드 러너’. 해리슨 포드가 좀처럼 말이 없고 반골 성향이 강한 블레이드 러너 릭 데커드를 연기했다. 자, 이건 오프닝 시퀀스에서 리들리 스콧이 다시 한 번 줄글로 설명해주는 설정이니 그다지 꼼꼼히 숙지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 <블레이드 러너>는 저 스스로 이미 충분히 생물성을 지닌 넓고 조밀한 세계관을 지녔다. 무엇을 이야기하든 우리가 흔히 줄거리 혹은 기본 설정이라 부르는 것들을 먼저 공들여 소개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 레이첼은 넥서스6 모델보다 진화한, 인간의 기억과 꿈을 주입 받은 최신형 모델이다.(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데커드는 타이렐 회장이 아끼는 비서 레이첼(숀 영)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영화는 이후 로이 배티(룻거 하우어)가 이끄는 지구에 잠입한 리플리컨트 일행과 그를 쫓는 데커드의 싸움으로 전개된다. 블레이드 러너의 임무는 명확하고 그가 복제 인간들을 하나씩 처단해 나갈 것임은 서사의 자명한 순서일 터, 그래서인지 리들리 스콧의 관심은 조금 다른 곳을 향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복제 인간들은 자신들의 수명이 제동장치처럼 고작 4년으로 설정되어 있음을 알고, 생명 연장의 비밀을 풀기 위해 타이렐 회장을 만나려 한다. 죽음이 인간의 필연이라면 <블레이드 러너>에서 누구보다도 죽음을 인지하고 고민하는 이들은 인간이 아니라 비인간들이다.


시들지 않는 미장센 

▲ 아시아 문화에 대한 매혹이 드러나는 무국적의 디스토피아. <블레이드 러너>팀은 조명을 활용해 미니어처의 조악함을 효과적으로 감췄다.(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블레이드 러너>엔 의외로 대사가 없다. 릭 데커드는 어둡고 축축하며 무력하게 죽어가는 세계를 말없이 활보한다. 쉴 새 없이 터지고 부서지는 장르 영화의 틀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지독히 고독하고 모호한 세계가 여기 있다. CG를 최대한 배격하고 미니어처 세트와 조명 효과를 통해 물리적인 생생함을 구현하고 싶었던 리들리 스콧의 완벽주의는 <블레이드 러너>의 미장센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시들지 않도록 만들었다.


▲ <블레이드 러너>에서 눈동자는 핵심적 이미지 중 하나다. 리플리컨트의 눈동자 속에 세상의 풍경이 우주적인 이미지로 담긴 모습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덧없이 느껴진다. 블레이드 러너만의 능력인 리플리컨트를 구별해 내는 테스트 역시 홍채의 움직임을 통해서다.(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몇 가지 잊을 수 없는 신들만 복기해본다. 조로증을 앓는 유전공학자 세바스찬의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후반부의 장면은 매우 서늘하고 탐미적이다. 사람처럼 행동하는 인형이 즐비한 세바스찬의 아파트에서 데커드를 공격하기 위해 인형인 척 앉아있는 위안용 복제인간 프리스를 담은 장면은 아름답고도 그로테스크한 <블레이드 러너>의 미장센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어지는 데커드와 로이 배티의 대결 장면 역시 빛과 어둠, 흩날리는 먼지와 빗줄기, 낡은 아파트의 소음을 활용해 뼈가 부러지고 피가 솟구치는 고통을 잊을 수 없는 이미지의 잔영으로 환원시킨다. 약 15분 간 이어지는 이 결투 시퀀스는 그 자체로 묵시록적이며 또렷한 미장센의 총기로 빛난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 마지막까지 데커드와 격투를 벌이는 주인공, 복제인간 로이(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앞서 언급했듯 영화의 서사가 주력하는 건 복제 인간의 죽음에 관한 두려움이자 삶에 관한 열망이다. 그래서 <블레이드 러너>를 보고 있으면 당시 명실상부 헐리웃 최고의 스타 중 하나였던 해리슨 포드만큼이나 복제 인간들의 대장 로이 배티를 연기한 룻거 하우어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그는 실로 엄청나게 차갑고 처절한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데커드와 마지막 전투를 마치고 수명이 다해가는 복제인간 배티가 빗 속에서 내뱉는 독백은 한 편의 시가 되어 영화 팬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중이다. (룻거 하우어가 직접 마지막 대사를 고쳐 썼다는 일화 역시 유명하다)

<블레이드 러너>가 가진 품위는 로이 배티의 숭고한 집념으로부터 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 그것을 영혼이라 부르든 정신이라 부르든 그는 인간과 비인간을 통틀어 가장 ‘이상적으로 인간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캐릭터다. 복제 인간들의 죽음이 마치 내 것인 양 숙연해질 때, 데커드를 감시하는 동료 경찰인 개프가 나타나 “누군들 영원히 사나?”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러니 <블레이드 러너>는 인간의 영화라기 보다는 복제 인간의 영화에 가깝다. 그래서 질문하게 된다. 그렇다면 혹시 데커드도 리플리컨트가 아닐까? 


데커드라는 미스터리

 

▲ <블레이드 러너 2049> 속 데커드. 그는 자신의 성 안에 갇혀 과거의 환영에 잠긴 인물로 등장한다.

지난해인 2017년, 드니 빌뇌브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 2049>가 개봉했다. 35년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릭 데커드는 많이 늙었고, 지쳐 보인다. 이제 당신은 <블레이드 러너> 세계관을 가진 두 편의 영화를 견주면서 데커드라는 미스터리에 조금 더 근접할 수 있게 됐다.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는 데커드가 꾸는 꿈과 종이접기 인형을 통해 데커드 역시 복제 인간일 수 있음을 넌지시 암시한다. 데커드의 정체성에 관한 풀리지 않는 질문들과 과거, 기억, 꿈이라는 인간 고유의 속성들을 더 집중적으로 파고든 작품이 드니 빌뇌브의 영화다. <블레이드 러너 2049>가 <블레이드 러너> 본편을 잘 계승했기 때문에 어떤 쪽을 먼저 보든 서로를 크게 해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 두 개의 명징한 현상과도 같은 작품들을 놓고 영화 바깥의 체험이 주는 심오함에 놀라게 된다.

두 작품이 오랜 시간을 견주며 서로를 탄생시킨 결과, 그것 자체로 영화의 주제를 수행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35년의 시차를 두고 <블레이드 러너>의 세계를 다시 마주한 관객은, 시간과 기억을 뚫고 살아남은 데커드를 보면서 다시 한 번 질문해야 한다. “인간의 가치는 무엇으로 규정되는가?” 


2018년, 여전히 “공포 속에서 사는 기분이 어때?”

로이 배티가 결정적 순간에 릭 데커드에게 던지는 대사, “공포 속에서 사는 기분이 어때? 그게 노예의 기분이야”는 <블레이더 러너>가 끊임없이 소환되는 중요한 이유를 담고 있다. 화면 정중앙에 가득 들어찬 로이의 클로즈업된 얼굴은 관객을 향해 있다. 

82년, 92년, 그리고 2007년에 불려 나온 영화는 이제 2018년, 리들리 스콧의 또 다른 영화 <올 더 머니>와 함께 다시 한국을 찾았다.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영향도 있겠지만 영화의 배경인 2019년이 바로 코 앞에 온 미래라는 점이 더 피부로 와 닿는다. 다행히 환경 오염의 폐해는 <블레이드 러너>만큼 심하진 않은 것 같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블레이드 러너>를 물들이는 연약하고 황폐한 인간의 마음은 더 나빠지거나 나아지지 않은 채 여전히 우리에게 근원적 불안을 안긴다. 그러므로 <블레이드 러너>에서 때가 되어 묵묵히 죽음에 곁을 내주는 인간(비인간)의 모습은 오랫동안 슬픔의 여진을 남긴다.

언젠가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라는 명제에 대해, 우리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 순 없지만 도망치든 쟁취하든 받아들이든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대해 이렇게 지난하게 역설하는 SF영화는 과거에도 앞으로도 보기 드물 것이다.







Posted by CJ JOY

댓글 Comment : 0

댓글쓰기

이전 1 ··· 6 7 8 9 10 11 12 13 14 ··· 552 다음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