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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후보 중 여성 감독이 연출을 맡은 작품은 딱 하나였다.바로 그레타 거윅의 <레이디 버드>. 자신의 이름을 ‘레이디 버드’라고 직접 지은 열일곱 소녀를 주인공으로, 누구나 겪었을 법한 좌충우돌 성장기 영화다. 과거 일기장을 훔쳐보듯 너무나 공감되는 소녀의 성장담과 함께 애증의 관계인 모녀 이야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며 기존 할리우드 성장영화와 결을 달리한다. ‘엄마를 이해하는 순간 소녀는 어른이 된다!’는 의미를 가진 <레이디 버드>의 진정한 매력을 알아보자.


할리우드 성장영화 공식, 그게 뭐죠?

▲ 할리우드 성장영화 기본 공식을 철저히 따른 <프린세스 다이어리>(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할리우드 성장영화 기본 공식을 철저히 따른 <프린세스 다이어리>(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할리우드 성장영화에는 뻔한 클리쉐(cliché)가 많다. 미모의 배우를 캐스팅해서 두꺼운 안경 내지는 치아교정기, 혹은 둘 다를 장착 시킨 다음, 관객에게 함께 ‘눈 감고 아웅’ 해달라고 뻔뻔하게 요구하는 것 등으로 채워진다.

성적이 좋든 나쁘든 여주인공은 늘 학교에서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존재이고, 금발 머리 치어리더(와 그의 잘생긴 쿼터백 남자친구)를 동경하지만, 현실은 본인과 비슷한 처지의 (대개는 이민 2세인) 단짝 친구뿐이다. 그러다 우연히 학교 최고의 인기남에게 ‘발견’되고, 안경을 벗으면 미녀로 변신! 파티 드레스를 입고 슬로우모션으로 계단을 내려오는 순간이 하이라이트다.

행여 파티가 끝난 다음, 인기남과 헤어지게 되더라도 낙담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여태껏 친구로만 여겼던 이웃집 소년과의 진정한 사랑을 찾기 위해 거쳐 가는 난관에 불과하니까. 오래전부터 ‘신데렐라’와 ‘콩쥐팥쥐’를 통해 동서양에서 골고루 유통됐던, 착한 소녀가 ‘메이크오버쇼’를 거쳐 마침내 사랑을 쟁취하게 된다는 해피엔딩의 서사는 여전히 할리우드에서 반복되고 있다.


엄마! 어디 있어요? 존재감 없는 부모

기존 할리우드 영화가 답습하고 있는 또 다른 특징은 존재감 없는 부모의 역할이다. 그들은 너무 바빠 자식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시간이 없거나, 혹은 너무 성공한 존재라 애초에 자식들이 감히 고민을 털어놓기 어려운 상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어수선하고 무심한 아침 식사, 드레스를 차려 입은 딸을 보고 호들갑 떠는 장면 등을 제외하면 영화에서 부모들의 얼굴은 찾기 힘들다. 영화의 공간적 배경으로 학교가 등장하지만, 교사 또한 가차 없이 부모 못지않게 무능한 존재로 묘사된다. 이처럼 어른들은 소년과 소녀들만 남겨두고 영화 속 세상에서 증발한다.

주된 스토리는 소년과 소녀를 중심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시험, 친구와의 오해, 사랑과 이별 등 그들이 겪는 고민과 문제는 자체적으로 해결한다. 그러므로 “우린 이제 (부모 없이) 다 컸어요!”라며 뿌듯한 얼굴로 주인공들이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어 봤자, 관객으로서 현실감 제로 영화에 공감하기는 힘들다.


<레이디 버드>, 초고 제목은 <엄마와 딸>?

▲ 영화 <레이디 버드>로 첫 장편을 연출한 그레타 거윅(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레이디 버드>로 첫 장편을 연출한 그레타 거윅(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그레타 거윅의 손에서 탄생한 <레이디 버드>는 기존 할리우드 성장영화와 차별성을 둔다. 이중 가장 눈에 띄는 점이 바로 ‘엄마’의 비중이다. 이는 영화 초고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다. 제목은 <엄마와 딸>. 무려 350페이지가 넘는 초고 내용은 다분히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레타 거윅은 작품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각본에 녹여낸다. 이로 인해 각 작품을 살펴보면 그녀의 인생을 엿본 느낌이 짙다. 시간 순서대로 살펴보면, 고등학생 시절을 다룬 <레이디 버드>를 시작으로 뉴욕에 입성하여 겪는 신입생 시절의 적응기인 <미스트리스 아메리카>(2015), 대학 졸업 후 냉혹한 현실에 부딪히면서 겪는 고군분투기인 <프란시스 하>(2012)로 이어진다.

재미있는 사실은 각 작품에서 그려지는 모녀의 관계가 다르다는 점이다. <미스트리스 아메리카>에서는 딸과 엄마가 기숙사 침대에 나란히 앉아, 친구처럼 비밀을 속삭인다면, <프란시스 하>의 엄마는 고향에서 늘 딸을 걱정하고 행복을 기원하는 든든한 치어리더 같은 존재다. 대개 나이가 들면 들수록 딸과 엄마의 관계는 애틋하고 각별해진다. 이와 달리 <레이디 버드>의 10대 딸과 엄마는 이전 작품과는 완전히 다른 관계다.


10대 딸과 엄마, 특수하고 유별난 관계

▲ 영화 <레이디 버드>의 그레타 거윅 감독과 시얼샤 로넌(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레이디 버드>의 그레타 거윅 감독과 시얼샤 로넌(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제목이기도 한 ‘레이디 버드’ 는 주인공 크리스틴(시얼샤 로넌)이 스스로에게 붙인 이름이다.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에는, 새가 둥지를 떠나듯 고향 새크라멘토와 가족, 그리고 과거의 자신을 의미하는 ‘크리스틴’에게서 멀리 떠나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다.

물론 별안간 자신을 ‘레이디 버드’로 불러 달라고 요구하는 그녀의 속내는 단순히 이름에 대한 의미나 취향의 문제일 리 없다. 내막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소녀의 독립선언, 혹은 부모를 상대로 벌이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소유권 분쟁에 가깝다. 이 맹렬한 투쟁의 상대는 전적으로 엄마다.


▲ 극중 엄마와 딸로 등장하는 시얼샤 로넌(좌)과 로리 맷칼프(우)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극중 엄마와 딸로 등장하는 시얼샤 로넌(좌)과 로리 맷칼프(우)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엄마는 딸과 함께 미국 소설가 존 스타인벡의 오디오(카세트) 테이프를 듣고 같은 대목에서 눈물을 흘리지만, 이내 딸의 미래에 매몰찬 저주와 악담을 퍼붓는 사람이다. 레이디 버드 역시 조수석에 갇혀 엄마의 잔소리를 참느니, 차라리 달리는 차에서 몸을 던져 팔이 부러지는 것을 선택하는 되바라진 딸이다.

가장 상처가 되는 말이 무엇인지 잘 알아서 서로 서슴지 않고 독설을 내뱉는다. 그 와중에도 딸의 취향에 딱 맞는 드레스를 찾아내는 손길은 의기양양하고, 딸의 열광적인 환호에는 진심이 담겨 있다. 악독한 말을 주고받고도 용서나 화해의 과정 없이 다시 단단하게 봉합되는 관계. 그레타 거윅은 10대 딸과 엄마라는 특수하고 유별난 관계의 다양한 순간을 섬세하게 포착하며 공감대를 형성한다.


엄마를 이해하는 순간, 소녀는 성장한다

▲ 딸에게 엄마는 최초의 적이자 친구이며, 조언을 아끼지 않는 선배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딸에게 엄마는 최초의 적이자 친구이며, 조언을 아끼지 않는 선배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그레타 거윅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실제로 내 인생에 발생했던 사건들은 아니지만, 내가 아는 것과 공명하는 진실이 있다”고 밝혔다. 그녀가 알고 있는 확실한 진실은, 딸의 성장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엄마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나의 엄마’로서 구체적으로 그녀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새로운 경험을 할 때마다, 그녀는 이런 순간에 어땠을까?”라고 내 또래의 엄마를 무심코 상상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과 엄마의 삶이 겹쳐지고, 엄마가 가장 가까운 인생의 친구나 선배로 느껴지는 등 이런 순간들은 딸이라면 어김없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 순간을 돌아보면, 투지에 불타는 내 최초의 적은 사라지고, 어느새 늙어 작아진 엄마가 있다는 것 뒤늦게 깨닫는다.


▲ 엄마를 이해하는 순간 소녀는 어른이 된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엄마를 이해하는 순간 소녀는 어른이 된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성장영화 속의 시간은 좌충우돌을 겪으면서도 발랄하고 유쾌하게 흘러가지만, 그 순간의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앞으로 무엇을 잃게 될지 모르는 말간 소년과 소녀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에게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이야기가 어딘가 우리의 기억과 닮아 있는데, 정작 우리는 그 시절을 지나, 지금 여기 이곳까지 흘러왔기 때문일 것이다.

Posted by SMC 에디토리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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