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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곳곳의 작은 마을을 누비는 로드 무비이자, 아녜스 바르다의 실제 삶과 영화 세계의 편린을 비추는 에세이 영화로써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대단히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자유롭고 관대한 형식처럼 보이지만 구석구석 뜯어볼수록 정교한 손길과 지혜에 놀라게 되는 영화다. 

바르다와 JR이 실제 자신을 반영해 만든 드라마와 길 위에서 만나는 주민들의 사연이 서로를 향한 생생한 탐색의 여정을 형성하는데, 이는 다큐멘터리의 카메라가 삶 그 자체와 우정을 나누는 것처럼 느껴진다. 유쾌한 웃음으로 문을 열어 어느덧 눈꺼풀 깊은 곳에서 뿌옇게 밀고 올라오는 온기로 경외심을 자아내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을 소개한다.



티 없이 맑고 깊은 두 시선의 만남

▲ 창가에 기댄 두 사람, 아녜스 바르다와 JR (출처: 네이버 영화)▲ 창가에 기댄 두 사람, 아녜스 바르다와 JR (출처: 네이버 영화)


우연은 언제나 최고의 조력자야


아녜스 바르다가 영화 연출에 처음 도전하는 사진작가 동료에게 건넬 수 있는 최고의 조언은 불쑥 찾아오는 우연을 운명처럼 맞이하자는 다짐이다. 프랑스 뉴웨이브 시네마의 대모라 불리는 아녜스 바르다가 86세를 막 넘긴 시점, 나이에 아랑 곳 않고 현재 진행형의 영화 만들기에 나선 그에게 딱 맞는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 

바르다는 포토부스가 설치된 커다란 밴을 타고 유럽 전역의 거리를 누비는 1983년생의 유명 포토그래퍼 JR과 의기투합해 즉흥적으로 촬영 계획을 세운다. 둘은 유쾌한 성품과 활발한 작업 의지를 가졌다는 점에서 오랜 친구처럼 막역하고, 55세의 나이 차이가 만드는 좁힐 수 없는 시간의 간극 앞에선 할머니와 손자처럼 서로를 보듬는다.


▲ 평생 응시와 기록의 힘을 믿고 즐겨온 두 아티스트는 조근조근 내레이션을 더해가며 서로의 시선을 교차시켜 나간다 (출처: 네이버 영화)▲ 평생 응시와 기록의 힘을 믿고 즐겨온 두 아티스트는 조근조근 내레이션을 더해가며 서로의 시선을 교차시켜 나간다 (출처: 네이버 영화)


JR은 “비계를 오르내리는” 사진작가다. 그를 수식하는 명칭 중엔 ‘컨템포러리 공공 예술가’가 있다. 그는 한 곳에 정착해서 살아가는 생활양식을 거부하고 포토 트럭을 타고 돌아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준다. 한 명씩 부스에 들어가 앉으면 거대한 트럭 뒤편에서 초대형 초상화가 인화되어 나오는 일종의 ‘JR 매직 트럭 쇼’다. 

그는 소외 계층의 주거지나 낙후된 지역에 가서 사람들의 얼굴을 곳곳의 여백에 붙이는 작업을 해 왔다. 한마디로 아녜스 바르다와 JR의 만남은 운명적. 아녜스 바르다는 1955년 데뷔 이래 <5시에서 7시까지의 끌레오> <행복> <방랑자> 등에서 폐부를 찌르는 주제 의식으로 극영화를 완성시켰고,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같은 다큐멘터리 작업으로 노년기의 정체성까지 공고히 다진 현존하는 노감독 중 한 명이다. 

둘은 그렇게 서로의 만남 자체가 하나의 콘텐츠가 될 수 있다고 믿은 듯하다. 평생 응시와 기록의 힘을 믿고 즐겨온 두 아티스트는 조근조근 내레이션을 더해가며 서로의 시선을 교차시켜 나간다. 무수한 얼굴과 풍경들(영화의 원제를 영어로 풀면 ‘Faces, Places’다)은 여름날의 도보여행처럼 한없이 한가롭고 나른한 동시에, 문득 생의 정수를 가늠하게 만드는 심오한 순간을 열어준다. 추측하건대, 그 찰나가 바로 영화 초반부에 바르다가 원했던 협업을 통한 ‘위대한 도약’일 것이다.


인간의 찰나(刹那)를 포착하는 클로즈업

▲ 공장 단체 사진 앞에 서 있는 두 사람 (출처: 네이버 영화)▲ 공장 단체 사진 앞에 서 있는 두 사람 (출처: 네이버 영화)


페도라와 선글라스를 잃지 못하는 젊은 사진사와 은색-붉은색의 투톤 염색을 하고 괴팍한 농담을 즐기는 영화의 대모의 티격태격하는 모양새가 주는 즐거움은 분명 관객의 몫이다. 화사하고 발랄한 로드 무비의 외피로도 충분하지만, 영화는 기어이 심장을 내려앉게 만드는 비애감도 품고 있다. 

소리 없이 켜켜이 쌓인 응시가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진짜’ 표정이 드러나는 순간들이 그렇다. 노련함이 곧 편안함으로 발휘된 베테랑의 영화 세계에서 수많은 스침과 만남의 순간은 대체로 대수롭지 않게 그려진다. 바르다와 JR은 폐광촌에 남은 마을 주민들, 거대한 평야에서 홀로 일하는 농부, 우체부, 부두와 공장 노동자들을 만난다. 평범한 소시민을 찾아 갔다고 말하기엔 어딘가 뭉뚱그린 표현으로 느껴지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묘사하자면 그들은 점점 사라져가는 존재다. 

바르다는 이 속을 헤집고 들어가 그들에게 말을 건다. 지금의 나날들은 어떤지, 과거의 추억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이야기한 뒤, 사진을 찍고 미련 없이 떠난다. 바르다가 예찬하는 우연은 이 과정에서 종종 놀라운 기회를 선사하는데, 마침 당일 퇴직을 앞둔 공장 노동자를 만나 또렷한 클로즈업으로 그를 바라보는 순간은 인간에 대한 깊은 예찬을 불러일으킨다. 

철거를 앞둔 폐광촌 마을을 떠나지 않고 버티던 씩씩한 한 주민은, 자기 집 벽면에 걸린 커다란 자신의 얼굴을 보고 곧 눈물을 흘릴 위태로운 표정을 짓기도 한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의 카메라는 아주 사소한 만남과 고백을 경유해 그들이 지금 여기, 혹은 어딘가에 단단히 버티고 있다는 걸 지긋이 증명한다.


영화에 대한 영화라는 끝나지 않은 숙제

▲ 올해로 90세가 된 노장 감독 아녜스 바르다(출처: 다음 영화)▲ 올해로 90세가 된 노장 감독 아녜스 바르다(출처: 다음 영화)


올해로 아녜스 바르다는 90세가 됐다. 영화 속에서 바르다는 선글라스를 끼고 돌아다니는 JR을 보며 손쉽게 장 뤽 고다르를 떠올린다. 실제로 JR은 고다르의 젊은 시절과 꽤 비슷한 외양을 가졌다. 바르다가 고다르를 처음 만난 것이 33세였고, 영화 속에서 바르다를 만난 JR이 딱 33세다. 

1955년부터 영화를 만들었던 바르다는 90세를 목전에 앞둔 상태에서도 여전히 휘적휘적 거리로 활보한다. JR과의 협업이라는 포맷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보자면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바르다 자신이 지금껏 찾아간 많은 얼굴과 장소들, 특히 영화를 찍었던 곳들(예를 들면 <방랑자>(1985)의 촬영지)을 재방문하는 뭉클한 기행이기도 하다. 생생한 거리를 담고 작가의 목소리가 도드라진다는 데서 프랑스 뉴웨이브 영화인들의 활동을 ‘재연’하려는 의도처럼 읽히기도 한다.

영화를 끝까지 보게 되면 그 직감이 영 틀리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바르다는 JR과의 동행을 용기 삼아 꽁꽁 베일에 숨겨진 자신의 오랜 친구, 장 뤽 고다르를 만나러 간다. 이번 영화에서 바르다의 가장 상기된 얼굴을 만날 수 있는 순간이다. 그리고 다소 애틋하기까지 한 방문기 끝에서 바르다는 ‘자크’라는 한 조각의 이름을 얻는다.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이 암호에 힌트를 얻고 싶은 관객을 위해 자크 드미를 조금 소개하려 한다. 

<쉘부르의 우산> <로슈포르의 숙녀들> 같은 프랑스 뮤지컬의 부흥을 이끌었던 자크 드미 감독과 아녜스 바르다는 사이가 좋기로 소문난 부부였다. 1990년에 그가 작고하기 전까지 아녜스 바르다는 종종 남편의 그늘에 가려져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인상을 줄 정도로 자크 드미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그에 대한 사랑은 바르다의 작품 <낭트의 자코>(1991)에서도 드러난다. 장 뤽 고다르가 바르다에게 전달한 키워드인 ‘자크’와 ‘해변’은 아녜스 바르다의 ‘전과 후’처럼 보인다. 긴 여정 끝에 자기 인생의 줄거리를 건네 받은 거장은 처음으로 눈물을 보인다.


흐릿한 눈 위에 비친 또렷한 생

▲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 중 프로필 컷 (출처: 다음 영화)▲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 중 프로필 컷 (출처: 다음 영화)

바르다는 데뷔작인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1955)에서 작은 어촌 마을의 풍경 속에 팽팽한 심리 드라마를 녹여냈는데, 이건 <400번의 구타>나 <네 멋대로 해라>가 나오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이번 영화를 끝낸 뒤 바르다는 어쩌면 이 작품을 끝으로 다시는 영화 작업을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슬픈 예감을 내비쳤다. 


복싱을 하는 거랑 비슷하죠. 끝내 버티지 못할 걸 알면서도 다시 링 위에 올라가잖아요. 나는 내가 한 번 더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 <인디와이어>



아녜스 바르다는 곧장 침대로 직행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실제로 바르다는 각종 전시를 비롯해 여러 플랫폼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가능한 최대치의 예술적 시도를 놓치지 않으려 노력 중이다. 그는 세월 앞에서 물리적으로 점점 흐릿해 지는 눈앞에서 불안을 감추기 보다는, 그 눈에 담기는 생의 이면을 긍정한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이 가진 깨끗하고 꾸밈없는 아름다움은 전적으로 만든 이가 지닌 결 고운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일 테다.

Posted by SMC 에디토리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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