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CJ


영화 역사 상 그런 영화들이 있다. 장르적 쾌감을 선사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데다가 시대를 담아낸 시선까지 훌륭한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바로 그런 영화다. 역대 최고의 사이코패스 킬러 캐릭터라 할 수 있는 안톤 시거를 탄생시켰고, 서부극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영화 중 장르에 가장 충실한 영화이기도 했으며, 더 이상 과거의 지혜와 경험들이 통용되지 않는 미국 사회의 냉혹함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그야말로 작품성과 흥행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휘어잡은 영화. 그 비결이 무엇인지 한 번 살펴본다.


원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2018 재개봉 버전 포스터(출처: 네이버 영화)▲<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2018 재개봉 버전 포스터(출처: 네이버 영화)

 

이 영화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소설가, 코맥 매카시의 동명 소설을 각색해서 만들었다. 코맥 매카시는 현재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언급될 정도로 미국 사회와 역사에 대한 통찰력을 하드보일드 장르 속에서 표현해 내는 작가다. 가장 폭력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그리면서도 마치 눈앞에서 보는 듯한 사실적인 묘사 기법으로 언어를 시각화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닌 작가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읽다 보면 마치 영화의 장면을 보는 것처럼 상황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이 때문인지 책으로 출간되기도 전에 교정본이 프로듀서인 스콧 루딘에게 전달돼 영화화를 진행했다. 루딘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레이디 버드> 등을 제작한 미국의 유명 제작자다. 소니 픽처스에 소속된 프로듀서이자 미국에서 유일하게 아카데미상, 에미상, 토니상을 모두 석권한 인물. 그는 원작을 보자마자 영화화를 결심했고 곧바로 코엔 형제를 떠올렸다고 한다.

 

▲에단 코엔, 조엘 코엔 형제 감독(출처: 네이버 영화)▲에단 코엔, 조엘 코엔 형제 감독(출처: 네이버 영화)

 

코엔 형제는 원작을 보고 더 이상의 각색이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 영화적인 요소들이 풍부해 다듬는 정도의 작업이 될 거라 생각하고 원작의 흐름과 인물들을 그대로 지킨 채 각색을 시작했다. 한 명이 책을 읽으면 다른 한 명이 그대로 받아 쓸 정도였다고 하니, 이 영화는 원작의 힘에 기댄 점이 크다고 볼 수 있겠다.


 

범죄자, 킬러, 보안관의 대립각 구도

서사를 이끌어 나가는 세 인물, 보안관 에드(토미 리 존스), 도망자 르웰린(조슈 브롤린), 킬러 안톤(하비에르 바르뎀). 이들은 단 한 번도 하나의 쇼트 내에 공존하지 않는다. 단 한 번 르웰린과 안톤이 밤거리에서 총격전을 벌이며 마주하지만, 서로의 시선이 마주하는 대신 총구와 신체가 마주할 뿐이다. 계속 어긋나고 구별되는 세 명의 서사들은 원작이 지니는 묵시록적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그 어떤 가능성도 예상하지 못하도록 암울하게 밀어붙인다.


 

▲(왼쪽)에드 역의 토미 리 존스, (오른쪽)르웰린 역의 조슈 브롤린(출처: 네이버 영화)▲(왼쪽)에드 역의 토미 리 존스, (오른쪽)르웰린 역의 조슈 브롤린(출처: 네이버 영화)

 

진리와 정의를 세우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의지를 다지는 에드는 르웰린과 안톤의 범죄를 막기에 역부족이다. 의지가 앞선다 해도 벌어지고 있는 범행이 그의 능력 밖의 일로 처리된다. 그래서 에드는 항상 절망하고 피곤해 한다.
반면 도덕과 비도덕, 범죄자와 피해자의 경계에 위치한 르웰린은 생존이 아닌 돈가방이라는 물질적 욕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건다. 르웰린의 모호한 경계성은 안톤의 행위의 모호함과 비교 대립된다.


 

▲안톤 시거 역할의 하비에르 바르뎀(출처: 네이버 영화)▲안톤 시거 역할의 하비에르 바르뎀(출처: 네이버 영화)

 

국적과 소속이 모호한 안톤의 범죄 행위는 불명확한 범행 동기로 인해 파괴성이 더욱 극대화된다. 안톤의 모호함이 적대자로서의 폭력성을 부각시킨다면, 르웰린의 모호함은 주인공으로서의 위치를 흐려 버린다. 그래서 이 둘의 관계는 주인공과 적대자, 선과 악의 경계 자체를 해체시키는 단계로까지 나아간다.


 

서부극의 현대적 재해석

▲존 포드 감독의 <역마차>(출처: 네이버 영화)▲존 포드 감독의 <역마차>(출처: 네이버 영화)

 

서부극은 세 번의 커다란 역사적 변곡점을 만들어 냈다. 첫 번째 변곡점은 존 포드의 <역마차>. 이전의 서부극이 선인으로 대표되는 주인공 백인 이주자와 적대자인 인디언 원주민 사이의 대립을 분명히 제시했다면, <역마차>는 이러한 대립 구도를 전복시켰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석양의 무법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을 맡았다.(출처: 네이버 영화)▲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석양의 무법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을 맡았다.(출처: 네이버 영화)


두 번째 변곡점은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으로 대표되는 마카로니 웨스턴(이탈리아 감독들이 만든 서부극). 존 포드가 전복시킨 선악의 구도를 레오네는 이주자의 시선으로 해체시킨다. 결국 서부극은 유럽 서구의 아메리카 대륙 침략이라는 역사적 진실을 은폐시킨다는 비판에서 이를 폭로하는 수단으로 이어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흐름은 90년대 중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에 의해서 다시 한 번 변곡점을 맞이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출처: 네이버 영화)▲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출처: 네이버 영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에는 반(反)영웅이 아닌 비(非)영웅이 출연한다. 전복된 선악 구도가 이주자의 시선에 의해 해체되었다가 결국 그 어떤 것도 선악이 아닌 모호한 단계로 진입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엔 장르적 쾌감이 부재한다. 오히려 존재론적으로 ‘과연 나는 왜 이 서부에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만 던질 뿐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이 세 가지 변곡점을 적절하게 뒤섞어 놓는다. 선인은 모호해졌고 악인은 더욱 악해졌으며, 이들을 제압해야 하는 과거의 ‘영웅’은 서사 속에서 그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과거의 서부극이 미국의 개척사에 대한 끊임없는 다시 읽기를 시도했다면, 이 영화가 전유하고 있는 서부극은 과거가 아닌 현재 존재하는 서부로서의 황야, 그 어떤 생의 토대로 이어가거나 희망할 수 없는 냉정한 현 미국 사회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제목에 담긴 이중 의미

원작의 도입부에서 제목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는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의 <비잔티움으로의 항해>라는 시에서 따온 구절임을 밝힌다. 그 시의 첫 구절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늙은 사람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

 

 

결국 제목에 대한 정확한 번역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아니라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라 할 수 있다. '없다'와 '아니다'는 큰 차이를 드러낸다. 전자가 존재의 부재,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애초에 부재하다는 점을 강조한다면, 후자는 존재의 부정, 분명 어딘가에 있을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차이를 좀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선 ‘노인을 위한 나라’가 무엇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이츠의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늙은 사람은 한낱 하찮은 물건이고
막대기에 걸린 누더기니
다만 영혼이 손뼉 치며 노래하지 않는다면,
썩어 갈 모든 누더기를 위해 더욱 소리 높이 노래하지 않는다면,
또한 영혼의 장엄한 기념비를 배우지 않는다면
노래를 배울 곳은 어디에도 없다.

 

 

노인으로 대표되는 인물, 보안관 에드는 영화의 첫 장면 내레이션으로 자신이 맡은 사건에 대한 충격을 전달한다. 아무런 동기 없이 범행을 저지른 살인자. 스스로를 지옥에 갈 인물이라 정의 내리는 비인간적인 태도. 그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에드의 내레이션은 이 시대가 지니는 잔인성을 함축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바로 이러한 현 시대와 대립된다. 예이츠의 시처럼 노래를 배울 곳이 어디에도 없는 나라, 그래서 더 이상 영혼이 손뼉 치며 노래할 수 없는 나라가 현 시대라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그러한 노래를 배울 수 있는 나라다.

한국어 제목은 이러한 나라가 애초에 없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이는 더욱 묵시록적인 분위기를 강하게 고착화시킨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원제는 그러한 나라가 분명 있었지만 현재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는 일말의 희망을 남긴다. 과연 어떤 의미의 제목이 더 본 내용을 잘 표현할 지는 온전히 관객의 몫이다.

Posted by SMC 에디토리얼

댓글 Comment : 0

댓글쓰기

이전 1 ··· 11 12 13 14 15 16 17 18 19 ··· 587 다음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