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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독창적인 스타일리스트를 꼽자면 단연, 고(故) 김기영 감독이다. <하녀>를 비롯해 <화녀> <충녀> 등 ‘악녀 시리즈’, <이어도>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등 그만의 그로테스크한 작품세계만 봐도 ‘기인’ ‘괴짜’란 수식어가 잘 어울린다.

올해는 등장만으로도 아우라가 넘치는 그가 타계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다. CGV아트하우스는 시대를 앞서나간 시네아스트로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오는 15일 ‘한국영화인 헌정 프로젝트’로 CGV명동역 씨네라이브러리에 ‘김기영관’을 개관한다. 이에 맞춰 대표작 <하녀>를 통해 김기영 감독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본다.



자신을 ‘변태’라 칭한 감독

▲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독창적인 스타일리스트 고(故) 김기영 감독(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독창적인 스타일리스트 고(故) 김기영 감독(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1997년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김기영 감독의 특별전이 열렸다. 전성기 시절, 괴팍한 기인으로 알려졌고, 이후 좀처럼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김기영 감독을 기다리는 객석에는 긴장과 설렘이 가득했다. 자신의 영화 속 남자주인공 같은, 특유의 비현실적인 말투로 입을 연 김기영 감독은 관객과의 대화 시간 내내 몹시 유쾌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그것은 생산적인 질의응답과는 거리가 멀었다. 상기된 얼굴로 손을 든 관객들이 영화에 대한 이런저런 해석과 논평을 말할 때마다, 김기영 감독은 ‘그렇게 봐주시면, 저는 고맙지요’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개의 관객과의 대화들이 종종 감독의 과시이거나, 어쩌다 변명이거나, 이따금 논쟁이 되기도 한다면, 김기영 감독은 그의 존재만으로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어떤 질문도 김기영 감독을 감복시키거나 당황하게 하지 못했고, 그는 영화 장면과 인물들 너머 감춰진 자신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그저 재미있다는 듯, 손자를 놀리는 짓궂은 할아버지 같은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얼굴이 알려진 한 평론가가, 대담하고 충격적인 성적 묘사가 등장한 장면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인간의 무의식과 욕망, 프로이트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거론된 기나긴 질문을 귀 기울여 듣고 나서, 김기영 감독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대답했다. “그건 사실 내가 변태라서 그렇습니다.”


▲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 특별전 당시 <하녀>와 함께 상영했던 비운의 작품 <반금련>(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 특별전 당시 <하녀>와 함께 상영했던 비운의 작품 <반금련>(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나는 상을 받으려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야. 오직 영화가 좋아서 영화를 만들지.어떤 사람이 내게 물었어. 왜 이런 영화를 만드냐고. 내 답은 다음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야. - 『24년간의 대화』 p.99 -


나는 그 순간 객석에 퍼졌던 웃음의 느낌을 아직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김기영 감독의 개구쟁이 같은 대꾸에는 현학적인 질문을 조롱하려는 악의 같은 것은 담겨 있지 않았다. 제작 현장에서는 소품 하나부터 배우의 동작까지, 모든 것을 챙기는 깐깐한 감독으로 악명 높은 그가, 이제 완성된 영화는 온전히 관람하는 당신들의 것이며,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영화만 만드는 사람일 뿐, 그 이후의 과정에는 나서지 않겠노라 분명하게 답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는 1960년에 개봉한 영화가 37년 만에 극장에서 다시 상영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관찰하는 것이 즐거워 보였다. 그는 영화제 특별전 덕분에 “손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고 귀띔하며 씩 웃었다.


김기영 감독은 왜 <하녀>라는 제목을 택했을까?

▲ (좌) 개봉 당시 <하녀> 포스터 (우) CGV아트하우스 김기영 마스터피스 특별전 [욕망의 해부학] 중 <하녀> 포스터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좌) 개봉 당시 <하녀> 포스터 (우) CGV아트하우스 김기영 마스터피스 특별전 [욕망의 해부학] 중 <하녀> 포스터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하녀>는 김기영 감독이 이후 연출한 <화녀> <충녀> 시리즈의 출발이 된 작품이다. 사실 ‘하녀’라는 호칭은 유럽 봉건시대에나 어울릴 법한 단어인데, 1960년대 한국에서 가정 살림을 도맡아 했던 그녀들은 ‘식모’로 부르는 게 적확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김기영 감독은 왜 ‘하녀’라는 제목을 선택했을까? 영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아내(주증녀) 몰래 가정부(이은심)와 관계를 맺은 한 남자(김진규)의 이야기 즉, 치정극으로 보인다. 하지만 섣불리 판단하기엔 주제가 현저히 다르다. 영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계급과 신분 상승의 욕망에서 비롯된 드라마가 강하다.

이는 자신이 유혹한 남자를 통해 신분 상승을 꾀하려다 추락하는 하녀의 서사로, 2층집의 중심에 위치한 계단을 통해 시각적으로 표출된다. 특히 계단은 영화의 주제를 대변하는 이미지로 쓰인다. (김기영 감독의 팬인 박찬욱 감독은 <하녀>의 특징을 살려 김기영관 개관 축하 메시지 영상을 계단에서 촬영했다.) 아내의 자리를 탐내는 외부인, 하녀의 욕망 역시 자주 베란다에서 창문 너머 방 안을 지켜보는 얼굴로 드러난다.


▲ 피아노로 연주하는 음악 소리 못지않게 큰 소리를 내는 것은 아내의 재봉틀이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피아노로 연주하는 음악 소리 못지않게 큰 소리를 내는 것은 아내의 재봉틀이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하녀의 욕망과 서사가 시각적으로 영화에 드러난다면,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사운드의 대립으로 제시된다. 남편은 음악을 가르치는 사람이고, 피아노를 애지중지 여긴다. 그러나 피아노로 연주하는 음악 소리 못지않게 큰 소리를 내는 것은 아내의 재봉틀이다. 재봉틀 소리는 소음에 불과하지만, 돈을 벌어들이는 밑천이며, ‘덕분에 2층집을 사서’ 그들이 ‘동네에서 제일 가는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예술 하는 남편의 경제적 무능력과 불안 때문에 아내는 재봉틀을 멈출 수 없고, 그래서 남편은 재봉틀의 소음을 견뎌야만 한다. 분노한 하녀가 건반을 내려칠 때, 남편은 ‘피아노 줄이라도 끊어지면 어쩔 것이냐’라고 자신과 피아노의 유약함을 드러내는 반면, 2층으로 남편과 하녀를 올려보낸 다음에도 아내의 재봉틀 무쇠 바늘은 견고하게, 규칙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움직인다.


통속극이며 스릴러, 어쩌면 잔혹한 공포물

▲ 하녀가 원하는 것은 남자의 사랑으로 요약되지 않는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하녀가 원하는 것은 남자의 사랑으로 요약되지 않는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하녀>에서 남자가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수동적이고 무력한 존재라면, 여자들은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각자 비밀을 품고 계략을 꾸민다. 친구를 부추겨 연애 편지를 보내게 했던 경희(엄앵란 분)가 필사적으로 남자의 사랑을 쟁취하려 한다면, 하녀가 원하는 것은 남자의 사랑으로 요약되지 않는다.

‘경희에게는 지지 않겠다’라는 경쟁심이 남자의 아내로 대상을 바꾼 것으로 추정되는 맥락이 있는가 하면, ‘살 집을 갖고 싶다’라거나 ‘가족을 원한다’에서 드러나는 신분 상승의 욕구 및 안정에 대한 추구가 있고, 상대를 가리지 않는 복수와 위협이 번갈아 등장하다가, 이내 육체를 내세워 유혹하고 도발한다. 종잡을 수 없는 그녀의 행동은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기괴한 야생의 존재, 혹은 괴물을 떠올리게 만들고, 이내 하녀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쥐의 운명과 겹쳐진다.

<하녀>에서 경희가 다니는 공장의 풍경과 기숙사는, 부유한 사립학교를 연상시킨다. 일해서 돈도 벌고, 일과가 끝나면 공부도 할 수 있고, 예쁜 옷을 입고 피아노를 배우러 다니는 엄앵란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이들은 나도 공장에 가고 싶다고 꿈꿨을 지도 모른다. 하녀가 남편을 유혹하는 장면에서, 분노한 나머지 극장에서 일어나 욕을 퍼부었다는 이들에게 <하녀>는 전혀 다른 텍스트였을 것이다. 유혹에 무너지는 남자의 모습에서 어떤 이들은 가슴 철렁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통속극이고, 누군가에게는 스릴러, 어쩌면 잔혹한 공포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김기영 감독은 영화의 말미, 직접 관객들에게 말을 건네며, 모두의 안녕을 확인한다. 58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다시 보아도, 흑백 화면 속 <하녀>는 여전히 대담하고 기괴하며 매혹적인 작품이다.



이 글을 읽고 김기영 감독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면 <하녀>를 꼭 추천한다. 말과 글로서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시 파격적인 영상을 구현했던 감독의 영화는 일단 봐야 제맛! <하녀>를 비롯해 <충녀> <화녀 ‘82> <육체의 약속> <이어도>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등 감독의 대표작 6편이 오는 15일부터 CGV아트하우스 김기영 마스터피스 특별전 [욕망의 해부학]으로 만나볼 수 있다.

Posted by SMC 에디토리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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