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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주석 사망, 성수대교 붕괴, 그리고 다사다난했던 1994. <벌새>는 그동안 한국영화 속에서 쉽게 재현되지 않았던 중2 소녀의 일상을 1994년의 격동기 속에서 덤덤히 쫓는다. 때로는 서늘하고 때로는 따뜻한 영화적 시선은 모두 감독의 자전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 이 작품을 보기 위해선 먼저 1994년의 이야기들과 감독,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벌새>의 시작은 감독의 경험에서부터

▲ 김보라 감독(왼쪽에서 세 번째)은 <벌새>로 제 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제네레이션 부문 대상을 받았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김보라 감독(왼쪽에서 세 번째)은 <벌새>로 제 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제네레이션 부문 대상을 받았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프리미어로 상영된 뒤, <벌새>는 전 세계 15개 영화제에서 25개의 상을 수상했다. 한 신인감독의 작은 한국독립영화가 이뤄낸 성취임을 생각해본다면 <벌새>의 기록은 <기생충>의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과도 비견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여성 감독의 활동이 중요하게 인식되는 요즘 혜성처럼 등장한 김보라 감독에게 우리는 모두 주목해야 한다.

감독은 동국대학교 영화영상학과를 졸업하고 뉴욕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영화과를 졸업했다. 대학원 졸업작품으로 만든 단편영화 <리코더 시험>(2012)로 제14회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SIYFF 대상을 수상하며 많은 기대를 모았지만, <벌새>를 제작하기까지는 그로부터 5년이란 긴 시간이 걸렸다. 작은 예산으로 시대극을 찍어야 했기에 펀딩을 받지 못해 중간에 좌초될 정도로 작업 환경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감독은 낙심할 법한 시간들을 홀로 장소 선팅과 시나리오 수정으로 작품의 내실을 기했다. 인물들의 감정 흐름을 인텍스카드로 만들어 촘촘히 배치할 만큼 캐릭터의 감정선에도 집중했다. 그 결과 개인의 사적인 이야기는 보편적 힘으로 관객 모두에게 다가온다. 모두 지난했던 제작 기간을 깊은 성찰로 승화시킨 감독의 집념 덕분이다.

 

1994년, 당신은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

▲ 당신은 ‘은희’로부터 당신의 어떤 기억을 보는가?(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당신은 ‘은희’로부터 당신의 어떤 기억을 보는가?(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현대사 속에서 1994년은 김일성 주석의 사망과 성수대교 붕괴의 해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1993년 2월 25일, 14대 대통령으로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며 국민들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이뤄냈다는 성취감과 동시에 억압되어 있던 사회문화적 혜택들이 해금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같은 시대를 그린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는 서태지와 아이들, 홍대 클럽, 1980년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자유분방한 대학 캠퍼스 풍경들이 묘사된다.

분명 이러한 낭만의 시대이기도 했지만 서강대 박홍 총장의 주사파 논쟁으로 ‘신공안정국’이 형성됐는가 하면, 조정래 작가의 소설 <태백산맥>의 이적성 논란이 이어졌고 주사파 연쇄살인사건으로 군부독재 이후의 냉전이 여전히 사회에 파장을 끼치고 있던 시기였다.

<벌새>는 바로 이러한 시대의 양면성에 집중한다. 은희에겐 친구와 클럽에 놀러갈 수 있는 자유가 허락되는 반면, 집에선 가부장의 폭력으로 억압당한다. 학교에선 “나는 노래방 대신 서울대에 가겠다!”는 구호를 집단으로 외치고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저런 애가 나중에 우리 집 식모 된다”는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벌새>의 시대는 여성으로서, 중학생으로서 그 시대를 경험했던 감독의 시선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한문선생 영지는 멘토? 또 다른 은희!

▲ 영지는 은희의 멘토이자, 스스로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영지는 은희의 멘토이자, 스스로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벌새>의 한문선생, 영지(김새벽)는 은희의 가장 중요한 멘토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묘사되는 멘토의 모습은 좋은 면만 부각되거나 초월적 깨달음을 얻은 현자로 등장하곤 하는데, <벌새>는 은희의 멘토인 영지를 이전의 영화 속 멘토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룬다.

대학교를 오랫동안 휴학하고 작은 한문학원에서 선생을 맡은 그녀는, 연락도 잘 되지 않고 한곳에 오래 머물지도 않는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묵묵히 민중가요를 불러주며 위로하는가 하면, 말없이 우롱차 한잔을 건네며 상대 속마음 깊은 곳을 어루만져주는 따뜻함도 지녔다.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영화는 자세히 다루지 않지만 은희처럼 세상과의 관계에서 갈등하면서도 스스로와 화해를 이뤄가는 복합적인 캐릭터로 묘사하며 영지의 감정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이러한 영지의 입체적인 면들은 영화 속 모든 인물에게 부여된 조건이기도 하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통한 시대적 폭력, 그리고 희망

▲ 영화 속 식탁 장면의 이미지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속 식탁 장면의 이미지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벌새>의 은희를 이해하려면 그 시대의 남성중심적인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이해해야 한다. 영화는 식탁에 앉은 가족들의 위치만으로 가족내 서열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정 가운데 앉아 연설하는 아버지의 언어폭력은 오빠의 물리적 폭력으로 전이된다. 지시한 사항을 이행하지 않았단 이유로 은희를 가차 없이 폭행하는 은희 오빠는 시대적 폭력이 어떻게 후대로 이어지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인물이다.

<벌새>는 이러한 은희의 가정 내 폭력이 단지 은희 가정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아버지에게 골프채로 맞았다는 친구 지숙(박서윤)의 고백은 가정폭력이 사회적 폭력이었음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그럼에도 <벌새>는 폭력의 주체를 단순히 ‘악역’으로 그려내지 않는다. 아빠는 딸의 수술을 앞두고 병원 복도에서 흐느껴 운다. 오빠 또한 성수대교 붕괴 사건 앞에서 홀로 흐느껴 운다. 이들의 눈물은 어쩌면 그들이 수행한 폭력이 사회적 차원의 폭력에 길들진 결과는 아니었을지 들여다보게 만든다.

 

▲ <벌새> 는 은희라는 인물의 가장 사적인 성장영화이자 시대를 관통하는 역사영화이자 여성영화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벌새> 는 은희라는 인물의 가장 사적인 성장영화이자 시대를 관통하는 역사영화이자 여성영화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벌새>는 1994년을 관통하는 은희의 성장영화지만 90년대 중반의 복잡 다단했던 사회의 한 단면을 미시적으로 들여다 보는 역사영화이자, 한국영화 속에서 역사의 주체로서 한 번도 그려지지 않았던 여중생을 다룬 여성영화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2019년 현재를 다시금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거울 같은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Posted by 사용자 SMC 에디토리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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