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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돌아왔다. 헌데 감독과 연이 깊은 가족 같은 출연진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다. 영원한 이별을 맞이한 故 키키 키린 여사가 없더라도, 오랫동안 감독의 영화에 출연한 아베 히로시, 릴리 프랭키 등의 모습은 도통 보이지 않는다. 대신 까뜨린느 드뇌브, 줄리엣 비노쉬, 에단 호크 등 낯선 배우들이 등장한다. <어느 가족>으로 제71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이후,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이란 비모국어 영화로 새롭게 도전을 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배우와 배경지가 바뀐 상황에서 그의 가족 사랑은 계속 이어질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떤 선택?

▲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첫 번째 비모국어 영화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첫 번째 비모국어 영화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일본을 대표하는 감독 중 한명인 구로사와 기요시는 2010년대 이후, 자국을 떠나 해외 자본과의 협업을 시작했다. <은판위의 여인>은 여전히 감독의 인장이 찍혀 있으면서도, 일본을 배경으로 했던 이전 영화에서 보지 못했던 미묘한 지점들을 발생시킨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올해 부산영화제에서도 공개되었던 우즈베키스탄 배경의 신작 <지구의 끝까지>는 일본과 우즈베키스탄의 수교 25주년을 기념하는 다국적 프로젝트였다.

물론, 이런 선택들이 순전히 ‘창작’을, 작품의 질적 향상을 위해서 만은 아니었다. 점점 일본 내에서 작가 영화를 만들기 어려워져 가는 현상의 단면이 그대로 보이기 때문이다. 구로사와 기요시와는 다른 영역에서, 하지만 여전히 작가영화의 최전선에서 지난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역시 일본 영화의 내향화와 갈라파고스 화를 경계했던 감독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드디어, 일본이라는 경계를 떠났다. 그리고 첫번째 비모국어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을 연출했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구로사와 기요시의 <해안가로의 여행>이나 <은판위의 여인>처럼 여전히 작가가 가진 고유의 개성을 간직한 채로 아시아, 일본이라는 경계를 가로지른 영화일까. 아니면 왕가위가 미국에 가서 찍은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처럼 장소만 바뀐 동어반복일까.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감독이 가장 잘하는 이야기!

▲ 프랑스 국민배우 까뜨린느 드뇌브가 파비안느 역을 맡았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프랑스 국민배우 까뜨린느 드뇌브가 파비안느 역을 맡았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그의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을 실망시킨 적이 없는 감독이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최근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들에 비해서 이야기 자체가 주는 중압감이 크지 않은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여전히 감독의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는 인장들은 확실하게 찍혀있다.

오랜 기간 배우로 활동한 파비안느(까드린느 드뇌브)는 ‘진실’이라는 이름의 회고록 출판을 앞두고 있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딸이자 미국에서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 뤼미르(줄리엣 비노쉬)와 뤼미르의 남편 행크(에단 호크), 딸 샤를로트(클레망틴 그르니에)가 파리로 온다. 뤼미르는 파비안느에 회고록을 읽게 되는데, 거짓 내용으로 가득 찼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엄마와 갈등하기 시작한다.


▲ 이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걸어도 걸어도>(2008)와 닮아있는 듯 하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이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걸어도 걸어도>(2008)와 닮아있는 듯 하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이야기의 구조만 보자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대표작 <걸어도 걸어도>가 즉각적으로 생각난다. 주인공 료타(아베 히로시)는 10여년 전 죽은 형의 제사를 위해 부인과 딸과 함께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다. 그리고 그날 료타는 어머니 토시코(키키 키린)가 숨겨왔던 잔혹하고도 냉혹한 일면을 목격하게 된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자식과 혈연으로 연결되지 않은 또다른 가족이 한 공간에 모여 벌이는 어색하고도 날 선 공기를 영상화 하는 것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전매특허.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감독이 가장 잘 하는 이야기를 프랑스에서 전개했다고 해도 크게 어색하진 않을 것 같다.


비밀과 진심이 교차되면서 정의되는 ‘진실’이란?

▲ 한국 관객들이 사랑하는 배우 에단 호크와 줄리엣 비노쉬가 함께 한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대화와 감정들을 통해 어떤 ‘마법’같은 순간을 선사한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한국 관객들이 사랑하는 배우 에단 호크와 줄리엣 비노쉬가 함께 한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대화와 감정들을 통해 어떤 ‘마법’같은 순간을 선사한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그렇지만,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최근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지점들도 내장하고 있다. 사회 시스템의 균열을 지적하고 그 균열의 상처를 끊임없이 벌려내 기어이 보는 이들 이성의 헛점 앞에 붙들어 세우는 <세 번째 살인>(2017),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은 좀도둑 가족이라는 비도덕적 인물들을 내세운 <어느 가족>(2018)은 휴먼 드라마와 사회파 영화를 충돌시켜 온도를 끌어올리는 영화다. 그 이전 <걸어도 걸어도>(2008)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역시 가족극이라는 연극적 장르 위에 인간의 이기심과 냉혹한 일면들을 내장해두고 그것이 예측하지 못한 순간 불현듯 튀어나오는 서늘한 영화들이었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역시도 주인공 ‘파비안느’가 숨겨왔던 비밀과 딸 뤼미르가 숨겨온 진심들이 교차되면서 ‘진실’이 새롭게 정의되는 어떤 과정을 다룬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인물들은 부서진다. 하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인물들이 부서져 가는 과정을 저벅저벅 따라가거나, 혹은 균열된 지점을 끄집어내 상처의 간격을 끝없이 벌리는 방식으로 이 이야기를 다루지는 않는다.


▲ 언제나 가족 이야기로 자신의 주제의식을 관철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언제나 가족 이야기로 자신의 주제의식을 관철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결국 가족 안에서 쓸모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 –

 

감독의 전작을 예로 든다면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나 <태풍이 지나가고>(2016)를 연상하는 것이 더 가까울 것 같다. 이번 영화에서도 여전히 가족은 짐스럽고, 혹은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어떤 상처를 준 존재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안에 불필요한 사람은 없다는 낭만적 믿음을 설파하는, 따뜻한 이야기에 가깝다.



가족영화를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것이 기타노 다케시의 인터뷰다. ‘가족이란 남들 안 볼때 내다버리고 싶은 존재’. 하지만, 이 인터뷰에는 어떤 ‘행간’이 숨어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릴 수 없는 존재라는 의미. 단절되려 해도, 삭제하려 해도 끝없이 한 개인의 삶에 달라붙은 행간 같은 존재. 한 인간은 어쩌면 가족이라는 행간들이 모여 형성된 정체성을 지고 사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분명 최근의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자기가 속한 일본이라는 국가를 근심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영화들은 점점 더 처절해지고 인물들은 위악적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일본이라는 국가를 떠나 프랑스에서 찍은 영화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조금 더 원초적인, 가족과 그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와 감정에 더 집중해서 영화를 완성했다. 그리고 이 대화와 감정들이 모여 어떤 ‘마법’ 과도 같은 순간을 맞이한다. 그 ‘마법’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는 극장에서 직접 확인해보시기 바란다.

Posted by 사용자 SMC 에디토리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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