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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과 칸 국제영화제에서부터 아카데미 시상식까지 선의의 경쟁을 벌인 작품을 꼽자면,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페인 앤 글로리>와 함께 칸테미르 발라고프의 <빈폴>을 꼽을 수 있다. 왠지 모를 정감(?)이 느껴지는 제목과 달리, 전쟁으로 모든 게 폐허가 된 영화 속 세상은 차갑기만 하다. ‘삶은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이 영화에 칸 국제영화제는 주목할 만한 시선 감독상의 영광을 전했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국제장편영화상 후보로 올렸다. 포스터부터 강렬함이 느껴지는 영화의 매력은 무엇일까?



‘목소리 소설’로 전달된 전쟁, 그리고 여성의 이야기

▲ 영화 <빈폴>은 제72회 칸 국제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 감독상을 수상했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빈폴>은 제72회 칸 국제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 감독상을 수상했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어떤 시대가 있고 어떤 사건이 있다면, 그 시대와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각처럼 모아서 하나의 사건을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목소리 소설이 나왔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출간하면서 내가 맞는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2017년 서울국제문학포럼 中 –

 

2015년 10월 8일. 스웨덴 한림원은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스웨덴 한림원은 수상자 선정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의 작품을 “우리 시대의 고통과, 용기에 대해 다양한 목소리를 써낸 기념비 적인 문학”으로 정의했다. 실제 작가는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 출신으로 2차 세계대전, 아프가니스탄 전쟁, 1986년 체르노빌 원전사고 등을 취재하고 생존자와 관련자들을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 인터뷰들을 토대로 일종의 연대기를 구축한 뒤 이것을 소설로 옮겨 ‘목소리 소설’이라는 그녀 특유의 문체를 확립했다.

하지만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되던 2015년 이전 국내에 출간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작품은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체르노빌의 아이들’뿐이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되던 2015년 10월 8일, 드디어 대표작인 1983년작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가 출간되었다. 전쟁에 동원되어, 전쟁이라는 예외적 비상사태에 복무해야 했던 여성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마자 마치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역사적 기록에서 증발되어 버린 이들을 인터뷰한 방대한 기록이자 이야기는 흡입력이 대단했다. 동시에, 제목이 주는 강렬한 문학적 정감은 독자들에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원동력이 되었다.


전쟁 or 삶은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 영화 <빈폴>의 감독 칸테미르 발라고프(좌)와 이야 역에 빅토리아 미로시니첸코(우)(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빈폴>의 감독 칸테미르 발라고프(좌)와 이야 역에 빅토리아 미로시니첸코(우)(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2020년, 이 책의 제목을 살짝 비틀어 자신을 설명하는 영화 한 편이 도착했다. 1991년생인 젊은 러시아 감독 칸테미르 발라고프의 두 번째 장편작 <빈폴>이다. 이 작품의 포스터와 공식 예고편에는 ‘삶은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라는 문구가 반복적으로 노출된다. 실제로 칸테미르 발라고프는 인터뷰에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논픽션에서 모티브와 영감을 얻었고, 캐릭터의 감정선을 드러내는 몇몇 장면들에서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논픽션을 인용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작품이 ‘원작’은 아니지만 작품을 구상하는 데 큰 아이디어이자 뼈대가 되었음을 창작자가 직접 밝히고 있다. 포스터와 예고편에서 작가의 소설 제목이 살짝 바꾸어 인용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 각각 이야와 마샤 역을 밭은 빅토리아 미로시니첸코와 바실리사 페렐리지나는 <빈폴>로 영화 데뷔, 국제적 찬사를 얻었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각각 이야와 마샤 역을 밭은 빅토리아 미로시니첸코와 바실리사 페렐리지나는 <빈폴>로 영화 데뷔, 국제적 찬사를 얻었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이야기는 이렇다. 1945년 레닌그라드. 전쟁은 끝나고 소련은 승전국이 되었으나 상처뿐인 영광이고 여전히 국가는 전쟁의 상흔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수많은 남성군인만큼이나 여성군인들도 징발되었던 전쟁이고, 당연히 병원은 수많은 환자들로 포화상태가 된다. 병원에서 일하는 주인공 이야는 부상의 후유증으로 몸이 굳어버리는 질환을 앓으면서도 아들 파슈카(티모시 그라스코프)와 함께 때로는 고통스럽게, 하지만 많은 시간 행복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갑자기 이야의 삶에 커다란 재앙이 닥치고, 함께 전장에 나섰던 동료 마샤가 이야의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두 사람 사이에 얽힌 개인사적 맥락과, 그들을 둘러싼 사회사적 맥락이 서로 중첩되며 점점 영화의 핵심으로 달려간다.


객관적 시점으로 전쟁 후 여성의 삶을 바라보다!

▲ 영화를 보면 남들과 달리 키가 큰 이야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를 보면 남들과 달리 키가 큰 이야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친숙한 제목인 <빈폴>의 러시아어 원제는 <Дылда> (‘딜다’라고 읽는다)이다. 러시아로 ‘딜다’는 “꺽다리, 키다리”라는 뜻이 있다. 그리고, 살짝 비하와 경멸의 의미가 담겨있다. 우리가 흔히 ‘키는 멀대 같이 커서’로 표현 할 때의 ‘멀대’와 조금 더 맥이 닿는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러시아어 ‘딜다’를 영어로 바꾸면 이다. 역시 키다리 라는 뜻이니 한국 개봉 제목은 러시아어 원제를 영어로 바꾼 셈이다.

그리고 <빈폴>은 영화의 주인공 ‘이야’의 별명이기도 하다. 이야는 어디서나 눈에 띌 만큼 키가 큰 캐릭터로 설정되어 있고, 이야의 대립항인 마샤는 이야와 반대의 체구와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상반된 두 캐릭터를 통해 영화는 비상사태이자 극단적 예외 상황인 전쟁에 내몰린 인간들이 어떻게 반응해 나가는지, 어떻게 그들을 둘러싼 세계가 한 개인을 고통으로 내모는지 고발한다. 전쟁은 진행중이어도 종전 후에도 여전히 이에 휘말린 개인들의 삶에 기어코 생채기를 낸다. 그리고 동시에 개인에게 그것을 극복할 책임을 떠넘긴다.


▲ 칸이 발굴한 1991년생 천재 감독 칸테미르 발라고프는 <빈폴>로 칸 국제영화제에서 두 번째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칸이 발굴한 1991년생 천재 감독 칸테미르 발라고프는 <빈폴>로 칸 국제영화제에서 두 번째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빈폴>은 ‘질병’, ‘죽음’, ‘고통’, ‘전쟁’ 같은 서사적으로 강렬한 소재를 대거 차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은 이것들을 ‘구경거리 영역’이자 관객에게 흡인력을 제공할 ‘스펙터클 영역’으로 전환시키지 않기 위한 필사적 노력이 보인다. 그것은 영화 <빈폴>이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논픽션에서도 작가가 사수하기 위해 투쟁한 영역과 맥을 같이 한다.

칸테미르 발라고프는 인터뷰에서 “나는 관객들이 영화를 ‘이해’하는 것 이상의 느낌을 가져가길 기원합니다. 우리는 경험과 지식을 통해 영화를 이해하기 때문에 영화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해할 수 없어도 느낌이 발생하는 것이 감독으로선 더 중요합니다. 침묵이 말보다 더 의미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라고 자신이 이 작품에 접근한 방법을 밝힌 바 있다.



칸테미르 발라고프는 전쟁이라는 소재를 다뤘음에도, 이전의 위대한 러시아 영화의 전통, 이를테면 알렉산더 소쿠로프(실제 칸테미르 발라코프는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워크숍을 수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의 영화가 압도적으로 보여주었던 사유하는 이미지의 힘을 느끼게 만드는 작품으로 <빈폴>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실제의 전쟁과, 이 전쟁에 휘말려 고통받은 이름없이 사라진 수많은 여성들을 재현하는 윤리적 방법론의 사례로서 의미를 갖는다. 그러면서도 영화 자체가 주는 순수한 ‘재미’의 영역 역시 소홀하지 않도록 안배된 작품이다. 그런 의미에서 <빈폴>은 칸 국제영화제를 비롯한 다수의 해외 영화제에서 사랑받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Posted by 사용자 SMC 에디토리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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