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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얘기가 여러 사람을 불쾌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 보는 건 아직 살아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한 인간이 세상의 편견에 맞서 정진하는 과정을 그린 <69세>의 주인공은 제목처럼 69세 노인이다. 노인이 주연인 작품이 드문 상황에서 반가움도 잠시, 영화를 보는 내내 왠지 모를 우울감과 죄책감이 든다. 내 것이 아니라고 외면했던 세대를 마주하며 겪는 미안함 때문일까?



노년은 억울한 죗값 혹은 저주?

▲ 노인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영화 <69>세(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과학 기술의 발전을 이야기할 때면 어김없이 ‘100세 시대의 도래’를 들먹인다. 의료 기술의 발전뿐 아니라 생활 환경의 변화로 평균 수명이 연장되었다는 것은 분명 고무적인 일이지만, 이제 우리 세대는 전에 없던 낯선 새로운 질문과 맞닥뜨린 셈이다. 더 오래 살게 된, 그래서 길어진 노년의 시간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유년시절 장래희망을 묻고 대답할 때 상상했던 어른의 얼굴은 기껏해야 30대 언저리에 멈춰 있었던 것 같다. 그 다음의 인생이 남들처럼 적당한 순서에 따라 비슷하게 흘러가겠거니 얼마의 낙관을 담아 짐작하면서도 사실 우리 대부분은 70대 혹은 80대 이후의 모습을 1인칭으로 상상하거나 꿈꿔본 적이 없다. 

서럽거나 아프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정도 막연히 생각했을까. 젊음이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과대 포장되어 유통되는 동안, 그 반대의 극단에 놓여있는 ‘노년’은 자주 외면하고 싶은 미래로, 가끔은 지은 죄도 없이 치러야 하는 억울한 죗값처럼, 때로는 저주처럼 여겨졌던 게 아닐까. 임선애 감독은 <69세>를 통해 비슷한 질문들을 좀 더 구체화시킨다.


<69세>가 당신에게 묻는다

▲ 동거중인 동인(기주봉)과 함께 경찰서에서 고소장을 쓰는 효정. 하지만 이 마저도 쉽지 않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는 69세의 주인공 효정(예수정)이 20대 남자 조무사 중호(김준경)에게 성폭행을 당한 사건으로 시작된다. 발생한 것은 형사법에서 다뤄야 마땅한 범죄 사건인데, 법에 따라 가해자를 처벌하는 순조로운 사회적 정의는 쉽게 실현되지 않는다. 

고발 이후에도 소문을 걱정해야 하거나,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아이러니는 그나마 짐작 가능한 맥락이다. 하지만 ‘젊은 남자가 늙은 노인을 성폭행했다’ 라는 문장에 어김없이 실룩대는 입꼬리, 가해자의 주장 때문에 형사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까지 효정이 혹시 치매는 아닐까 의심하는 상황에 이르면, 누구도 원하지 않는 ‘피해자’라는 정체성조차 이 사회에는 암묵적인 연령 제한이 있었나 싶어 아득한 기분이 든다.

 

▲ 효정이 '몸이 처녀처럼 예쁘시네'라는 말을 자주 듣는 곳인 수영장. 하지만 이 말은 정작 본인에게 가시가 된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그러나 효정이 대결해야 하는 폭력들은 훨씬 더 자주, 거의 모든 곳에서 출몰한다. ‘몸이 처녀처럼 예쁘시네. 뒷모습만 보면 처녀인 줄 알겠어’, ‘노인치곤 옷을 깔끔하게 입고 다니셔’, ‘늙었으면 집구석에나 틀어박혀 있지. 젊은 사람 인생 망치려고 그러나’ 등 때론 노골적으로 날 선 가시를 들이대고, 때로는 선량한 칭찬인양 무심히 던지는 말에는 선명한 편견과 차별이 도사리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존재가 된 것처럼 소외되다가, 키오스크 앞에서 머뭇거리는 순간이 되면 사회의 속도와 효율을 따라가지 못하는 곤란한 방해물로 여겨지고, 욕망은 주책 맞거나 망측한 것으로 치부되는 무성의 존재, 기대 없는 날들을 살아가야 하는 세월. 그들은 우리가 운이 좋아 건강하고 무탈하게 남은 시간을 잘 살아내야 비로소 도착할 수 있는 우리의 미래다.


그들이 주인공이다

▲ 느리지만 사려 깊게, 능동적으로 움직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효정의 모습은 앞으로의 그의 삶을 응원하게 만든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우리나라영화에서 노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노인에 대한 이야기는 제작 투자를 받기 어렵다는 것이 현실적이고 표면적인 이유지만, 사실 노인 세대를 중심에 놓은 서사가 부족하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69세>는 중·노년층에 해당되는 이들이 선택과 행동의 주체로 등장한다. 효정은 수치와 분노를 숨기고 침묵하는 대신 고발을 결심하고, 동인(기주봉)은 고발문을 작성하고 경찰서와 병원을 드나든다. 두 사람 사이에도 의심과 불안은 존재하지만, 결국 서로를 돕는 과정에서 영향을 받으면서 이 관계는 균형과 성장을 동시에 이뤄낸다. 언뜻 법망을 빠져나간 것처럼 보였던 가해자 청년에게 가장 치명적인 응징을 가하는 것도 결국 미래의 장인으로 추측되었던 노인이다. 

그의 분노가 충분한 처벌은 되지 못하겠지만, 동인의 아들로 직업이 변호사인 현수(김태훈) 통화 내용으로 짐작하건대 가해자는 엄중한 법적 처벌도 받게 될 것이다. <69세>는 젊은 전문가가 등장해 곤경에 빠진 노인을 돕는 게 아니라, 여전히 존엄하고 당당한 그들이 직접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하고 행동하는 과정을 느리지만 사려 깊게 보여준다는 점이 돋보인다. 


영화는 2012년을 배경으로 삼아, 성폭력 특례법의 제정 시기와 내용을 언급한다. 감독 인터뷰에 의하면, 지금은 성폭행 사건이 접수된 경우 여성 경찰이 배치되고, 피해자에 대한 배려를 기본으로 수사가 이뤄지는 체계가 잡혔다는 것. <69세>의 배경이 된 2012년에 비하면 미투 운동이 바꿔 놓은 또렷한 변화다. 어떤 미래는 어쩌면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 같다. 

Posted by 사용자 SMC 에디토리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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